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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by 두우주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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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 기술 -

 
0123
출처 : 예스24
 

 

 
 
 
들어가면서

 우리가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삶인가? 삶은 우리가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요소들 그리고 우리를 마음 내키는 대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힘에 맡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삶이다. 최소한 마지막 날에는 그렇다. 누구 또는 무엇이 삶을 좌지우지하더라도 삶을 마무리 짓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이다. 우리만이 ㅡ 우리 자신에게 ㅡ 이 삶을 책임지는 것이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심지어 아주 작은 일에서조차 이 책임을 떠맡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이유에서 삶의 기술은 삶을 제때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삶'까지도 만들어내려는 진지한 시도이다. 이 책에는 이를 위한 몇 가지 생각과 방안이 담겨 있다. (7~8쪽)

 

 



 

 의의 또는 무의미는 그때마다 개인이 판단한다. 물론 삶의 기술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논쟁은 고대철학으로부터 수용될 수 있다. 왜 형성하는가? 삶은 짧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이것이 최종적 논거이다. … 죽음은 그저 삶이 끝났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형식을 통해 삶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일종의 경계이다. 죽음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가 그것에 관해 하는 생각에 따라 달라지고, 그 생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현대의 인간만이 엄청난 고독 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한다. 현대의 인간에게만 죽음이 삶의 절대적 한계이다. …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덕분으로 돌려야 할 것은 삶의 한계 설정이다. 이런 한계가 없었다면, 삶의 형성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폭발력을 내포하고 있음이 많은 폭동과 혁명을 통해 드러났다. 1989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지니고 있으며 허비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삶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것을 삶의 경과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 실현하고 싶어 했다. (41~43쪽)

 

현존하는 구조에 불만이 있을 경우, 그 구조를 변화시키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개인들이 조화로운 행동을 보여야 한다. 개별적 조치를 통해 변화하지 않는 구조의 공간과 오랜 기간의 분할에 따른 조화로운 행동 말이다. 공동체적 참여는 자기 자신의 것이건 타자의 것이건 삶의 형성을 위한 구조적 조건과 가능성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로 이것이 '삶의 기술의 정치'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이다. (46쪽)

 

주체는 타인들에 의해 구성되며 자기 염려만으로 자체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사실, 그러므로 타인과의 관계 형성 역시 자기구성에 해당한다는 사실, 또한 타인들에 대한 염려는 곧 자기염려라는 사실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염려는 확장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공동체의 내적 체질에 대한 염려로 변환한다.

마지막 질문은 나는 무엇을 확실하게 행할 수 있는가?라는 실질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주체의 기본적 태도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일상적 삶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삶에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훈련과 테크닉이 중요하다. … 삶의 기술의 효과를 본 사람은 충만한 삶을 이끌어간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철저하다. 왜냐하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삶의 '근거들'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사물과 자기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즐거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48~52쪽)

 

삶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기법 중 하나는 습관이다. 습관은 규칙적인 수련을 통해 생겨나며, 그 자체가 규칙성의 진수이다. 이 규칙성의 도움으로 우선 자세가 형성되고 행동방식이 습득된다. …

습관은 실행의 반복과 규칙성을 바탕으로 하여 필연적으로 선택의 부담을 줄여준다. 이제 자기는 습관을 통해 이미 결정된 것에 끌려가는 일을 용납할 수 있다. 습관은 우리가 암묵적이고 수동적인 선택을 통해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매 순간 해야 하는 선택의 끊임없는 요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때 모든 관점을 고려하는 습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습관의 의식적 형성이 필요하다. (54~55쪽)

 

혁명적인 열정은 부지불식간에, 그러나 저지할 수 없을 만큼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약화된다. 그리하여 습관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모든 변동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습관으로 접어들게 되고, 그렇게 해서 혁신을 확정한다. 그러나 변동은 새로운 습관을 정체에 이르게 만들기도 한다.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가 관성의 법칙을 모든 습관의 위험한 적대자로 삼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 칸트는 일상적 삶에 틀을 만들어주는 것은 인정했지만, 주체의 자율성과 자주적 판단력을 파괴하는 것들은 증오했다. 따라서 윤리적인 기본태도는 습관으로 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항상 새롭고 근원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 습관은 단조로움으로, "똑같은 행위의 생각 없는 반복"으로 이어지며, 심지어 인간을 본능에 이끌리는 동물로 변하게 한다. 줄여서 말하면, "모든 습관은 거의 항상 사악하다"는 것이다.

습관은 어쩔 수 없이 이중의 딜레마에 빠져든다. 습관화는 삶의 침착한 실행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늘 무감각이 뒤따른다. (63~64쪽)

 

한계 없는 자유만이 자기 강화의 힘을 모르고,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강화의 힘은 '한계 위반'의 순간에 감지된다. 자기강화의 힘을 지닌 자기는 쾌락의 활기를 해치지 않으며, 쾌락이 갑작스럽게 방향전환을 할 때도 그것에 종속되지 않으려 유의한다. "모든 향락을 탐닉하고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줏대 없는 자이며, 오만한 속물처럼 모든 향락을 거부하는 자는 아둔한 자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의 말을 전적으로 명심하려는 것이다. (71쪽)

 

무엇보다 젊은 사람은 심지어 자주 무절제에 몰두해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매우 사소한 유혹에도 망가져버린다"고 그는 말한다. 무절제는 이 외에도 지나치게 경직된 습관들을 떨쳐버리게 해준다. 그래서 몽테뉴는 쾌락이 자기에게 작용하도록 의식적으로 허락하고 그 쾌락을 통한 '주관화'에 의도적으로 복종하는 형식에 공간을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쾌락의 향유가 삶에 부여하는 자극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쾌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

성찰적 삶의 기술에서 쾌락 활용의 미학이 문제 될 경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몽테뉴를 연관시켜서 보게 된다. 단순히 쾌락에 자신을 맡겨버리지 않고 자기강화의 힘에 의지하며, 1) 어떤 쾌락을 2) 언제 3) 얼마나 오래 4) 누구와 더불어 5) 어떤 상황에서 6) 어느 정도로 7) 어느 지점까지 활용할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까다로운 태도에 의지하면서 쾌락을 산출하고,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테크닉을 다루는 능력과 결부해 쾌락 활용의 미학이 문제 된다면 말이다. (72~73쪽)

 

삶의 충만은 쾌락과 고통의 모순을 포함한다. 삶에는 쾌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안락함의 연속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의 일시적 자극이 없다면, 삶에는 쾌락은커녕 활기조차 없을 것임은 당연한 이치다. (82쪽)

 

고통이라는 소유물에서 초래되는 것은 자기강화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강화의 패배이다. 이 패배는 자기염려를 향한 새로운 동기를 유발하고 타자들도 그런 염려에 연관시킨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염려이다. 첫째, 이 패배 때문에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무엇 또는 누구를 잃지 않을까 걱정하는 두려운 염려, 둘째, 그것의 도움을 받아 밀접한 관계를 향해 더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앞을 내다보며 행동하게 되는 영리한 염려가 그것이다. (85쪽)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죽음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것이 몰아세운 다양한 구조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99쪽)

 

삶에 있어 중요한 극단의 염려로써 '죽음에 대한 사유'는 그 시발에서부터 철학의 한 특징이며, 이런 사상을 반복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일종의 훈련이다. 이 훈련을 통해 자기는 죽음을 눈앞에 똑똑히 보며 죽음에 익숙해지고, 죽음과의 친숙함을 얻어내고, 죽음에 자기 삶의 견고한 위치를 부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기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버리고, 죽음과 교통하는 가운데 언젠가는 '홀가분하게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것이다. (104~105쪽)

 

삶의 기술은 죽음의 기술과 결부되어 있다. 죽음은 삶을 그늘지게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다. 죽음은 유희를 가능하게 하며 무효화할 수 없는 규칙이다. 죽음은 우리의 생애 과정의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이 향해 가는 최종적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그럴 뿐, 목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삶을 다시 잃는다는 것은 삶의 조건에 해당한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삶을 죽음 덕분으로 돌리게 된다. 삶을 느끼게 해주는 죽음의 모순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삶은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106쪽)

 

가장 큰 고난의 시간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는 가운데,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시간이 자신 앞에도 다가올 것이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하는 가운데 극단의 염려가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꾸며대고 죽음을 개인들에게만 맡겨두었던 근대문화는 변화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111쪽)

 

아직은 어느 누구도 시간이 사실은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 같다.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모든 존재, 사물 그리고 관계들 안에서 자명하게 스스로만을 위해 현실성을 요구하는 현재의 상태는 소멸하며, 그 상태가 소멸된 뒤 다시 복구되는 과정이 진행되지 못한다는 단순한 소견만으로 충분하다. 이 과정은 지나간 과정으로만 인지되고, 지금 존재하는 것을 지나간 것과 비교하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 어떤 일을 다시 한 번 체험하거나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 과거를 되찾고자 하는 바람은 시간의 경험에서 매우 난처한 부분이다.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115쪽)

 

시간을 의식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맡겨진 시간을 어떤 경우에도 가득 채워 선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빈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책을 하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백일몽을 꾸거나 감각적 욕망에 몰두하는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 …

빈 시간은 현재의 어려움과 거리를 두게 하고, 그 어려움을 밖에서 바라보게 하며, 미래적인 것의 넓이를 시야에 떠오르게 한다. 이때 자기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난다. 자기는 시간을 얻는다. (124쪽)

 

우리는 글쓰기를 매개로 자기 자신에 대한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몽테뉴로부터 배운다. 그는 글쓰기를 수단으로 하는 실험을 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실험한다. 자신의 형식을 발견하기 위해 저술에서 자신을 실험한다. 그가 긋는 모든 선은 그 자신이 되고 있는, 지금 생성 중인 작품 속의 붓질이다. (129쪽)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의도적으로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 시도의 주도자는 주체 자신이다. 둘째는 자신에게 시도가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와 시도와 견줄 만하게 된 것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136쪽)

 

부정적 사유의 강점은 긍정적 사유마저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깊이로 기초를 놓는다는 데 있다. 이 부정적 사유의 방법은 원칙적으로 사물들, 관계들 그리고 인간들에 대해 최선의 것이 아니라 가장 좋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기본태도는 철저히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중의 의미에서 그렇다. 우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망을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망을 느낀다 해도 그저 편안하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두려워하며 예감하던 부정적인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경우, 그 일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그를 덮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만일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느 때라면 주목할 가치가 없었을 이 편안한 상태를 이제는 의식적으로 즐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좋은 일만 확인하거나 체험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관습적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갑작스럽게 불쾌한 일을 체험할 수 있다. (170~171쪽)

 

삶의 기술의 주체에게 멜랑콜리의 의미는 '골똘히 생각함'이다. 골똘히 생각함으로써 자신에게 성찰적 거리를 취하고,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정체성'으로 생각했던 것의 붕괴를 경험하고, 습관적으로 살면서 삶을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자명함을 벗어던지게 되는 것이다. 성찰의 고통을 절감하게 하는 것, 모든 것의 흔들리는 근거를 알고 자기의 미로와 같은 근거 없음을 인식하는 바닥없는 슬픔이 바로 멜랑콜리의 특성이다. (185쪽)

 

현재 기형적인 물건들이 도처에서 우리 주변으로 밀려들고 있다. 그것들은 일상의 사물들을 밀어낸다. 우리는 이런 기형적인 물건들을 '정보'라고 부른다. … 이런 정보들은 통신 채널과 고속 데이터 선로에 넘쳐흐르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포괄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가상공간을 형성한다. 이 가상공간의 가시성은 스크린으로 단순화되고 환원된다. … 이 공간은 일종의 잠재적 공간이며, 전래적 의미의 실질적 공간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들은 두 종류의 공간에서 살기 시작했다. 넓이를 지닌 진짜 공간뿐 아니라, 정보의 인공지능적 공간에서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상속받은 재산인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 실체의 데카르트식 구분, 그리고 실제 세계에 대한 인식 세계의 궁극적 승리이기도 하다. 이 인식 세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인식 세계는 전적으로 '일어난 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의 확산과 더불어 개인들은 하나의 경험이기도 한 허구적 공간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 존재한 적 없이도 현실적이며 사실적이기도 한 가상적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미 다양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왔다. 모든 삶의 영위에 영향을 미치는 신神들로 북적거리던, 별들과 그것들의 운동 법칙으로 북적거리던 하늘 아래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 천체는 디지털화되었다. (218~221쪽)

 

삶의 기술로서의 건강에서 질병과의 소통에 있어 치료가 문제 되는 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치료를 하는 것은 의사도 아니고 약도 아니다, 치료를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육체, 정신, 사고의 힘이라고 말이다. (244~245쪽)

 

삶의 모든 상황에서 불쾌한 일들을 가볍게 그리고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면, 실제와 달리 어려운 일을 흔쾌히 감수할 수 있고 심지어 즐거운 삶까지도 가능하다. 삶의 저울 위에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사유에서 무게를 어떻게 할당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

균형을 이루는 삶은 자기가 스스로에게 행하며, 그 도움을 통해 태도로서의 쾌활함이 생겨나는 작업과 관련이 있다. 쾌활함은 평정의 태도이다.

참된 자기강화는 영리한 염려를 바탕으로 불안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불안에 대한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롭다. …

쾌활함이라는 개념의 회복이 중요하다면, 무엇보다 먼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즉 쾌활함은 기쁨이 아니라 충만한 삶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쾌활함은 기쁨이 아니다. 설령 기쁨이 때로는 쾌활함의 한 표현양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심지어 지나친 기쁨은 쾌활함을 완전히 그르치기도 한다. 지나친 기쁨은 충분한 근거가 없는 한,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기쁨은 그저 하나의 격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쁨은 태도로서의 쾌활함이 더러 표현되는 격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251~255쪽)

 

쾌활함이 실존과 나락의 대결 가운데 생긴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그렇다면 삶이 힘들어지는 바로 그때, 밑바탕에 놓여 있는 비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뛰어난 진통제로서의 쾌활함이 생성된다. (264쪽)

 

행복에 대한 자세한 개념의 기본 텍스트는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윤리' 개념의 기본 텍스트이기도 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삶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 모든 개인에게 중요하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삶의 목표로서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onia, 일반적으로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선善이 등장한다. (267쪽)

 

삶 자체를 형성하려는 동기가 삶의 짧음에 있다면, 삶을 아름답게 형성하려는 충동은 삶을 충분히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그래야 역경에 처하더라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긍심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현존재는 심미적인, 다시 말해 긍정할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으로서만 '정당하다', 이런 의미에서 실존의 미학은 20세기에 매우 놀라운 호황을 경험했고, 근대사회의 거의 모든 개인을 매료했던 삶의 의의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긍정할 만한 가치의 추구와 같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동시에 '참된 삶'이다. 이 참된 삶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적대감과 억압에 맞서 살아낼 수 있는 삶이다.

우리가 수월하다고 말하는 삶이 무조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극복해야 할, 심지어 그 정체를 탐색해야 할 어려움들로 가득찬 삶, 저항, 분규, 궁핍, 그리고 싸워서 물리쳤거나 참아낸 갈등들로 가득 찬 삶이 중요하다. 좋은 삶과 행복에 속하지 않는 이 모든 곤경 가운데서 아름다움은 비로소 빛나는 법이다. (293~298쪽)

 


'자신의 아름다운 삶을 만들라'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권고와 삶 자체를 조형하고 형상화하려는 동기가 삶의 짧음에 있다면, 삶을 아름답게 형성하겠다는 자극은 삶을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동경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런 맥락에서 개인 자신에 의해서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의 기본적 명령은 '너의 삶을 긍정할 만한 가치를 가지도록 형성하라'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용기, 긍지 ㅡ 이것들은 추한 것의 출현과 함께 저하되며 아름다운 것의 출현과 함께 상승한다"고 말하고 같은 책에서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 모든 미학은 이런 소박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미학의 제1의 진리이다. 제2의 진리, 퇴락한 인간 이외에 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

나의 삶은 내가 조형하는 나의 작품이다. (302~315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지은이 : 빌헬름 슈미트
옮긴이 : 장영태
출판사 : 책세상
주    제 : 인문, 대중철학

 

 
 

빌헬름 슈미트 (1953~ )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했고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삶의 기술에 대한 철학적 기초>라는 논문으로 교 수 자격시험을 통과했고, 2004년부터 독일 에르푸르트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2012년 독일 메카처 철학상을 수상했고, 삶의 기술에 관한 여러 저술 활동으로 2013년 스위스 에그너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 《살면서 한번은 행복에 대해 물어라》, 《역경, 하나의 격려》, 《자신과 친구 되기》, 《균형의 기술》 등이 있다.

 

장영태(옮긴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횔덜린의 시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동 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횔덜린 시전집1·2》, 《문학연구의 방법론》, 《잠언과 성찰》 등 다수의 책을 옮겼고 《횔덜린: 생애와 문학·사상》, 《지상에 척도는 있는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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