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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책)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by 두우주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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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3
출처 = 알라딘

 

 

마 전부터 품위가 상실된 언행과 현상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저 한번 몰아치고 마는 파도가 아니라 온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광란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우리는 인간적 품위가 결여된 한 남자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끄는 정부는 스스로의 비열한 언행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과시하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해온 그 모든 불쾌한 언행들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그가 쏟아낸 너무나도 많은 혐오의 언행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12쪽)

 

위는 용어 자체가 모호하고 상대적인 까닭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가 가져다 쓰기에 아주 적절한 개념이었다. 그에게 품위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해석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의 연설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은가.

 

한편으로 나는 힘러의 전략에 눈길이 간다. 이처럼 인간의 기본 원칙에 해당되는 개념을 뒤틀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은 고도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유나 진실 그리고 정의와 같은 개념들을 고유의 뜻이 아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대척점에 있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대중으로부터 말을 빼앗음으로써 체제 유지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기여한다.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에는 선전 및 보도를 담당하는 진리부가 등장한다. 진리부는 정보를 통제하면서 당의 최고 지도자인 빅브라더의 통치에 유리한 프로파간다와 신조어를 만들어 퍼트린다. 예컨대 '자유는 노예다', '전쟁은 평화다', '무지는 장점이다' 등으로 정의하며 고문실을 유희실로 지칭하는 식이다. 즉 기존의 단어에 완전히 새로운 반대 의미를 부여하여 결국 고유의 뜻마저 잃게 된다. 그러면 단어가 가진 원래의 뜻은 사라지고 그 단어는 사용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이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 빅브라더에 대항하는 이들은 더 이상 아무런 언어도 갖지 못하게 된다. (24~25쪽)

 

우리는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예컨대 공동체·소속감·연대의식 그리고 몰입과 열정 등이 지닌 의미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상'이 없는 상태로 삶을 지속하며, '시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민으로 살아간다. 지금 우리는 기술 발전에 열을 올리며 첨단을 향해 가고 있다. 동시에 원인 모를 불안과 지속적인 자기표현 또한 극에 달하고 있다. 우리는 내심 자신의 불안을 부인하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과도한 불안에 뒤덮여 있다. 침착하고 냉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너무도 산만하다. (47쪽)

 

우리의 주제는 법이 아니라 공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법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려면 각 개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자세와 배려이다. 이를테면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에서 나름의 규칙을 하나둘 만들어가며, 석기시대 때부터 물려받은 충동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동물의 조심성처럼 서로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이에 더해 우리 모두가 각각 한 명의 시민으로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77쪽)

 

재차 말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극히 복잡다단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공간과 세계화라는 시대적 현상 속에서 무수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뭐든 서로 '쉽게 쉽게' 다루고 넘어가려 한다. 상대와 마주 앉아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컴퓨터 앞에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타자를 치며 뒷공론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이런저런 반론의 댓글을 남긴 다음, 커피를 끓이거나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본인이 쓴 글을 잊는다. 그러는 동안 그 댓글을 읽은 상대방은 인종 차별주의적인 발언에 타격을 받고는 얼음찜질로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분노로 거품을 물며 새로운 댓글을 달게 된다. 그러나 이 댓글은 읽히지 않는다. 방금 말했듯이 분노를 유발한 당사자는 자신이 쓴 댓글을 까맣게 잊은 채, 커피를 내린 다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로도 그는 철물점에 가서 사야 할 물건들 생각에 빠져 있을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뉘앙스 같은 미묘하고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0 아니면 1이다. 극단적이고 차가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그림자도 짙고 서늘하다. (83~84쪽)

 

그런데 진실을 말하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가 더럽혀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마크 트웨인이 남긴 말이 하나 있다.

 

리석은 사람들과 토론하지 마라. 그들은 당신을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린 뒤, 숙련된 기술로 당신을 두들겨 팰 것이다.

 

품위도 예의도 없으며 진실과 거리가 먼, 어리석은 자들은 바닥까지 치닫는 저급한 수준에 정통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마크 트웨인은 일찍부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01쪽)

 

《문 밖의 이방인》에서 이솝 우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토끼와 개구리>로 알려진 이 이야기에는 수많은 맹수에게 쫓기며 불안에 떠는 토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삶에 염증을 느끼고는 결국 연못에 빠져 죽기로 결심한다. 토끼들이 우르르 물가로 몰려들자 연못에 살던 개구리들은 깜짝 놀란 나머지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러자 토끼들은 세상에 자신들을 무서워하는 동물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때 교훈을 얻은 한 토끼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보다 더 불행한 처지에 있는 동물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맙시다." (105쪽)

 

즉 이들은 확실성이 보장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안정을 누린다. 그 세계는 옳고 그름이 분명히 정해져 있으므로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혼란을 느낄 일이 없다. 보통의 현실 세계는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통제도 어렵다. 따라서 현실 세계에서는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누구도 나에게 무언가를 묻지 않는다. 설령 묻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이 현실 세계에서는 대단하든 미미하든 간에, 인생이 발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세운다. 현실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 없어 확실하고 안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41~142쪽)

 

간에게는 아주 오래된 갈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며 세상을 보다 단순하고도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향한 그리움이다. 단순 명료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존재할 때 인간은 안정을 느낀다. (……) 세상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며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다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지도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다. 설령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거짓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때 유발되는 감정은 몹시 강렬해서 사람들은 이 감정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과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한 예로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신을 향한 신앙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가톨릭교회의 핵심은 신의 실존을 함께 확신한다는 데 있다.

(154~155쪽)

 

그러면서 부디 복잡함을 피해 단순함으로 숨어들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한 모순을 이해한다. 이 모순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순이 품위 없는 삶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처럼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매 순간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기 일쑤인 세상에서 오늘 살았던 방식대로 내일을 사는 것은 무척 어려울 수 있다. 심지어 하루 동안에도 같은 자리에서 서로 상충하는 생각이 생겨나기도 한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이 피할 수 없는 모순을 어떻게든 잘 다루면서 살아가야 한다. (186~187쪽)

 

즉 지능이 부족해서 비정하고 몰염치한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반대로, 이런 유형의 어리석은 인간들은 지능이 상당히 높을 수 있다. 지능이 높다는 표현보다 간교하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차라리 영혼이 어리석다고 일컫는 편이 나을 듯하다. 영혼의 어리석음은 무질이 언급한 "감정의 결함"과 맥을 같이 한다. 영혼이 어리석은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앞에 높인 인생이 두려우며, 미래가 불안하여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타인을 증오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유형의 어리석음은 이성적 판단을 거치치 않은 특정 감정들이 분출되도록 만든다. 이렇게 야기된 감정들은 한번 표출되기 시작하면 이성적으로 막아내기 쉽지 않다. (192~193쪽)

 

인간의 태도는 위기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처하면 시험대에 오른다. 이들 또한 위기에 직면하면 자신의 생각과 행위의 방향성을 틀어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운전대가 흔들리기도 하고 방향키가 쉽게 돌아가기도 한다. 게다가 두려움이 엄습하고 깃발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나부끼기 때문에 굳건히 버티기가 너무도 어렵다. (199쪽)

 

치 점령 시절 카뮈가 레지스탕스 지하 신문사에 기고했던 편지글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1943년과 1944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이 글에서 "부조리한 운명에 대항하여 싸우려면 사람들이 연대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자신 또한 이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라디쉬는 카뮈 평전에서 이렇게 적는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에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극히 기본적인 품위와 존엄이 요구되었다. 카뮈에게 인생철학은 그저 하나의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존엄과 명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는 "한 인간이 그 무엇도 하지 않고" 무심코 시대를 지나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207쪽)

 

수백여 년 전, 인간관계에 필요한 예법을 집필했던 크니게는 인간의 책무와 함께 인간의 다양성을 건드리기도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크니게는 "모든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이 세상에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

 

인간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차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241~242쪽)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능력은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생존력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능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본능이나 즉흥적 감정, 안락함과 게으름 그리고 영혼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이다. 다시 말해 '기본 설정값'을 스스로 넘어설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를 발견하려면 자신 안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은 바로 이 이성적 판단에 있다. (……)

여기에는 '모든 유형의 인간'과 연대하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연대감은 우리가 인간다운 품위라 칭하는 가치의 근본적인 토대이기도 하다. 각 개인의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244~245쪽)

 

 

원제 | Über den Anstand in schwierigen Zeiten und die Frage, wie wir miteinander umgehen

지은이 | 악셀 하케

옮긴이 | 장윤경

출판사 | 쌤앤파커스

주제 | 사회학, 사회문제 일반

 

 

악셀 하케 (Axel Hacke) 독일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최고의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요제프 로트상', 최고의 보도 기사에 수여하는 '에곤 에르빈 키슈상', 독일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테오도르 볼프상' 등을 받았다.

 

 

장윤경 (옮긴이) 전문 번역가로, 옮긴 책으로는 《뉴스 다이어트》, 《정신과 의사의 소설 읽기》, 《공감하는 유전자》, 《모멸감, 끝낸다고 끝이 아닌 관계에 대하여》, 《거대한 후퇴》, 《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