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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by 두우주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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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알라딘

 

목차

01
출처 : 알라딘

 

들어가는 말_이 세상의 가장 거대한 신비는 시간

 가만히 멈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시간이다. 친숙하고 은밀하다. 시간이라는 도둑은 우리를 끌고 간다. 1초, 1분, 1시간, 1년의 쏜살같은 흐름이 우리를 삶 속으로 밀어 넣었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끌고 간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산다. 우리 존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 세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시간이 이끌어가는 일들을 펼쳐나간다. (7~8쪽)

 

012
출처 : 알라딘

 

1부 시간 파헤치기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자.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인터넷으로 천유로 정도에 살 수 있는 정밀한 시계로 측정이 가능하다. 조금만 훈련하면 누구든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전문 실험용 시계가 있으면, 몇 센티미터만 낮아져도 시간이 지연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계는 탁자 위에 놓았을 때보다 바닥에 두었을 때 솜털만큼 더 느리다.

 시계만 느리게 가는 게 아니다. 아래쪽에서는 모든 과정이 더 느리다. 나이가 같은 두 친구가 있는데, 한 명은 평지에 살고 다른 한 명은 산에 산다고 해보자. 수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이 만나면, 평지에서 산 친구는 살아온 시간이 더 짧아서 덜 늙어 있다. ······

 믿기 힘든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어떤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흐른다.

 이처럼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무려 한 세기 전에 깨달았다. 심지어 정밀 시계도 없이 알아냈다. 그 위대한 인물은 바로 아인슈타인 Einstein, 1879~1955이다. ······

 태양과 지구가 서로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가'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태양과 지구가 직접 서로를 끌어당기지는 않지만, 양쪽 모두 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인가에 서서히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공간과 시간만 있으니 태양과 지구가 각자 주위의 공간과 시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물체가 물속에 잠기면 주변의 물이 흐트러지듯이, 시간의 구조가 변경되면 모든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그들이 서로를 향해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17~20쪽)

 

 나는 26세기 전에 지구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우주 공간을 떠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리스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 ······

 천문학과 물리학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지침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고대 천문학은 '시간 속'에서의 별들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다. 물리학 방정식들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설명한다. (22~23쪽)

 

 아인슈타인은 고유 시간들이 어떻게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정식을 가르쳐 줬다. 그리고 두 시간의 차를 구하는 방법도 가르쳐 줬다.

 유일하다고 생각한 '시간'이라는 양은 시간들의 거미줄 속에서 산산조각 난다. ······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예를 들어 두 시계가 멀리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기까지 경과된 시간은 하나가 아니다. (25쪽)

 

 과거와 미래는 다르다.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 상처가 나야 통증이 생기지, 통증을 느낀 뒤에 상처가 나는 일은 없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후회와 회한, 행복한 기억 같은 것만 간직할 수 있다. 반면 미래는 불확실하고 욕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어쩌면 미래 자체를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를 살 수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 미래에는 모두 가능한 것이다 ······. 시간은 양쪽 영역으로 똑같이 뻗은 선이 아니다. 끝부분이 서로 다른 화살표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보다 이 점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핵심이다. 시간의 비밀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맥박의 진동 속에, 기억의 수수께끼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있다.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은 정확히 무엇일까? 이 세상의 메커니즘 중에서 이미 존재해 왔던 과거와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일까? ······

 19세기와 20세기의 물리학은 이런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예상치 못한 사실과 마주하며 당혹스러워했다. 세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기본 법칙에서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원인과 결과, 기억과 희망, 후회와 의지의 차이) 없기 때문이다. (28~29쪽)

 

 굴러가는 공이 나오는 영상을 보면, 나는 이 영상이 정방향으로 재생되고 있는지 역방향으로 재생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상에서 공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면 정방향으로 재생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역방향으로 재생하면 멈춰 있던 공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믿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공이 이동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는 것은 마찰 때문이고, 이 마찰이 열을 생산한다. 그리고 열이 있는 곳에서만 과거와 미래가 구분된다. 생각도 과거에서 미래로 펼쳐나가야지, 그 반대가 되면 머리에서 열이 나고 만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역행 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명석한 독일인답게 그리스어로 '엔트로피 entropy'라는 명칭을 붙인다. ······

 엔트로피는 측정 및 계산이 가능한 양으로 문자 S로 표시하며, 증가하거나 균일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고립된 상황에서 '절대 감소하는 일은 없다'. (33~35쪽)

 

 열 요동은 카드 한 묶음이 계속 섞이는 것과 같다.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던 카드들을 뒤섞으면 무질서해진다. 이렇게 열은 (분자들의) 뒤섞임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39쪽)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엔트로피는 우리가 희미한 시각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산출하는 양이라는 점을 정확히 증명했다. 열과 엔트로피,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 등은 자연을 대략 통계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41쪽)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질량에 의해 늦춰진다는 것을 깨닫기 10년 전에, 시간이 속도 때문에 늦춰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발견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46쪽)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52쪽)

 

 현재가 아무 의미 없다면 우주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존재'하는 것이 '현재 속에' 있는 것 아닌가? 우주가 어떤 특별한 구성으로 '지금'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는 타당하지 않다. (65쪽)

 

 강력한 환각제인 LSD를 몇 마이크로그램만 흡입해도 우리는 거의 서사적인, 혹은 마법처럼 과장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영원이지?"라고 물으니, "어떤 때는 1초만으로도 영원일 수 있어." 하고 하얀 토끼가 대답한다. 잠깐이지만 모든 것이 영원히 얼어붙는 것 같은 꿈이 있다. (66쪽)

 

 우리가 아는 한, 시간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문제 삼은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384~322는 시간이 변화의 척도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물은 계속 변화하고,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측정하고 계산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걸까? (72쪽)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 아인슈타인, 이 세 명의 위대한 연구자들의 춤 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아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87쪽)

 

 시간은 더 이상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여러 시공간들이 파동처럼 요동치고, 서로 중첩이 가능하고, 특정한 물체와 관련해 특정한 시간에 구체화된다는 이미지는 우리에겐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정교한 입자성을 위해선 최선이다. 우리는 지금 양자 중력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98쪽)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세상은 '사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물질로, '실체'로, '현재에 있는' 무엇인가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혹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연적 발생으로, 과정으로, '발생하는' 그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지속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며 영속적이지 않다. ······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105~106쪽)

 

 

3부 시간의 원천

 인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자연의 조각들이고, 우주라는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채우는 일부분이며, 수많은 것들 중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와 세상의 나머지(우리를 제외한 모든 세상) 사이에는 물리적 상호 작용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모든' 변수가 우리나 우리가 속한 세상의 한 조각과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변수들 중 극히 '일부'만 상호 작용을 하고 대부분은 우리와의 상호 작용이 전혀 없다. 변수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도 변수를 알아채지 못한다. 세상의 배열이 분명히 다른 배열들임에도 우리에게는 동등하게 보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와 물 한 컵(세상의 두 조각) 사이의 물리적 상호 작용은 각 물 분자의 움직임과는 무관하다. (152쪽)

 

 과학 연구를 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기술하려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파생되는 왜곡이나 착시 현상을 없애려 노력한다.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며, 동의할 수 있는 관점을 공유한다. (159쪽)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에너지원이 아니라 낮은 엔트로피의 근원들이다. 낮은 엔트로피가 없으면 에너지는 균일한 열로 약해지고, 세상은 열평형 상태에서 잠들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도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가까이에 태양이 있어서 낮은 엔트로피의 원천이 풍부하다. 태양이 따뜻한 광자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구는 아주 차가운 광자들을 방출하면서, 어두운 하늘 쪽으로 열을 발산한다. ······ 태양이 우리에게는 낮은 엔트로피를 꾸준히 공급하는 최고의 후원자인 것이다. ······

 태양의 낮은 엔트로피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단 태양 자체가 매우 낮은 엔트로피 배열에서 탄생했다. 태양계가 형성된 원시 구름은 엔트로피가 더 낮았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주 초기의 극도로 낮은 엔트로피에 이르게 된다.

우주의 거대한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우주의 엔트로피 성장이다. ······

 엔트로피의 증가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장애물은 우주 곳곳에 널려 있다.

 우주의 모든 역사는 이렇게 엔트로피 증가가 멈추고 점프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167~170쪽)

 

 우리는 이야기다. 우리의 눈 뒤쪽에 있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20센티미터 영역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다. 또한 우리는 선이다. 이 혼란스럽고 거대한 우주의 조금 특별한 모퉁이에서 세상의 일들이 뒤섞이면서 남긴 흔적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엔트로피를 성장시키도록 맞춰진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선들이다.

이 공간, 즉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 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

 우리는 어떤 것을 갖게 되고 그것에 집착했다가 결국은 잃게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어떤 것을 시작했다가 결국은 끝나기 때문에 고통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시키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어쩌면 이런 고통스러운 측면 때문에 여러분도 지금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을지 모른다. 왜냐면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 (195~197쪽)

 

 아마도 우리는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면서 열적 시간의 한 방향으로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특별한 부분 계에 속하는 것 같다. 따라서 시간의 방향성은 실제적이지만 관점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돼'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균등하고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 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하여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다. (202~203쪽)

 

 시간의 미스터리는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고 깊은 감정까지 움직인다. 심지어 철학과 종교까지 성장하게 만든다. ······

물리학은 우리가 미스터리의 층들을 관통하도록 도와준다. 세상의 시간 구조가 우리의 지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가 감정 때문에 생긴 안개를 걷고 시간의 본성을 연구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점점 더 멀어지는 시간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스스로에 관한 무언가를 발견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하늘의 운동에 대해 연구하다가 우리 발밑의 지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함으로써 끝을 맺게 된 것처럼 말이다. ······

 앞으로 우리가 시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 세기 동안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수직 상승했고, 지금도 계속 알아가고 있다. 시간의 미스터리에 대해서도 우리는 뭔가를 힐끗 들여다보고 있다. ······ 마치 지는 해를 보다가 지구가 도는 모습을 본, '언덕 위의 바보'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시간이라는 것도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공간, 우리 신경들의 연결 속 기억의 흔적들에 의해 펼쳐진 초원이다. 우리는 기억이다. 우리는 추억이다.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이다. 기억과 예측을 통해 이런 식으로 펼쳐진 공간이 시간이다. 때로는 고뇌의 근원이지만, 결국은 엄청난 선물이다.

 끝없는 결합의 놀이가 우리에게 귀한 기적을 열어주고, 우리를 존재하게 해 준다. 우리는 지금 웃을 수 있다. 시간 속에 고요히 스며들어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우리 존재의 짧은 주기의 소중한 순간을 강렬하게 음미하면서. (205~208쪽)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abharata》의 제3장에서 강인한 영혼인 야크샤 Yaksa가 팝디바 Papdava의 최고령자이자 현자인 유디스티라 Yudhisthira에게 무엇이 가장 큰 신비인지 물었다. 이에 현자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산다."라고 대답했는데, 이 말은 수천 년 동안 회자되었다.

 나는 불멸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것은 고통이다. ······ 내 삶을 사랑하지만 인생은 피곤하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 한편으로는 다정하지만 적대적이기도 하고, 명확한 듯하지만 알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떼 지어 밀려드는 삶······, 그러나 나는 이미 이 달콤 씁쓸한 잔을 많이 마셨고, 바로 지금 천사가 도착해 '카를로, 때가 되었어."라고 말하면 무슨 때가 되었는지 굳이 묻지 않을 것이다.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따라갈 것이다.

 내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진화의 오류다. 수많은 동물들이 포식자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도망친다. 그것이 건강한 반응이고 그래야 위험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두려움일 뿐 계속되지는 않는다. 이 두려움 덕분에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이 지나친, 전두엽이 비대한 털 없는 유인원이 탄생했다.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은 분명 도움이 되는 특권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 유인원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 물론 두려움의 본능을 일깨워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게 해주기는 한다. 나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두 가지 진화의 압박에 의한 우발적이고 어리석은 간섭이자, 우리 뇌 속에서 발생한 잘못된 자동 회로 연결의 산물일 뿐 특별히 유용하다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일정한 기한이 있다. 인류도 마찬가지다.

 세월의 흐름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을 두려워하고 태양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이것은 이성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적인 논제들이 아니다. ······ 이성은 위와 같은 두려움들이 연결되는 사실을 밝히기만 할 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애초에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 두 번째 요건으로 이성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요건은 생존에 대한 갈망과 배고픔, 사랑의 필요성, 인간 사회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는 본능 등을 충족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이성이 있다. 이성은 우리가 사냥할 먹잇감을 찾아주는 길이라고 생각해 따라간 흔적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깨우쳐주기 위해 발전한다. 하지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우리는 황폐한 우리의 어리석은 뇌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구성한, 우주와의 상호 작용에서 이끌어낸 일관된 세상을 본다. 우리는 돌이나 산, 구름, 사람을 기준으로 세상을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세상'이라 여긴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바와 아주 거리가 먼 것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조차도 모른다. ······

 현실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조작한 집단적 망상으로, 진화를 통해 적어도 위를 지금 여기까지는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우리가 세상을 관리하고 돌보기 위해 찾은 수단들은 굉장히 많았고, 그중 최고는 이성이다. 이성은 소중한 것이다. (209~215쪽)

출처 : 알라딘

 

 

원   제 : L'ordine del tempo (2017년)
지은이 : 카를로 로벨리
옮긴이 : 이중원
출판사 : 쌤앤파커스
주   제 : 과학, 물리학, 우주과학

 

 

카를로 로벨리 (Carlo Rovelli)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양자이론과 중력이론을 결합한 '루프양자중력' 개념으로 블랙홀을 규명한 우주론의 대가로 '제2의 스티븐 호킹'으로 평가받는다.

 

 

 

 

이중원 (옮긴이)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원에서 과학철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주요 연구 분야는 과학철학과 기술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