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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책) 드래곤 티스

by 두우주 202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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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알라딘
 

 

지은이 : 마이클 크라이튼
옮긴이 : 이원경
출판사 : 인플루엔셜(주)
주제 : 미국 문학, 외국 과학소설

 

012
출처 : 알라딘

 

 

 윌리엄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는 조리개를 열고 노출 시간은 짧게 한다. 그러면 배경이 뿌옇게 돼 인물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풍경 사진에서는 조리개를 죄고 노출 시간을 길게 한다. 사람들은 가까운 풍경과 먼 풍경 모두 선명하게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노출 및 현상 시간 조절로 콘트라스트를 변화시키는 요령을 터득했다. 빛 속에 피사체들을 배열하는 법을 배우고, 맑은 날과 흐린 날에 따라 유제의 성분을 다르게 하는 법도 배웠다. 윌리엄은 열심히 배우면서 그 내용을 일지에 상세히 기록했다. 물론 불평도 늘어놓았다.

"난 이 작은 사내를 경멸하지만, 그가 내게 딱 한마디만 해줬으면 정말 좋겠다. 내가 마침내 사진 기술을 터득했다는 말."

하지만 이런 불평 속에서 한때 배를 모는 방법조차 귀찮아 배우지 않았던 거만한 청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윌리엄은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다.

5월 초, 칼튼은 감광판 한 장을 들어 빛에 비춰 보고 돋보기로 유심히 살폈다. 마침내 그가 윌리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인정해줄 만하군. 잘했어."

윌리엄은 뛸 듯이 기뻤다.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인정해줄 만하다! 인정해줄 만하다! 이렇게 달콤한 말은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면에서도 윌리엄의 태도가 변했다. 탐사 여행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28~29쪽)

 

 1876년 5월,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분주한 도시였다.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 화려한 행사는 실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우뚝 솟은 전시관들 사이를 누비면서 윌리엄은 세상을 놀라게 한 갖가지 신기한 것들을 목격했다. 거대한 콜리스 증기 기관,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온 식물과 농산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새로운 발명품들.

가장 뜨겁게 떠오른 화두는 전력 활용의 전망이었다. 심지어 밤거리를 밝히는 전등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앞으로 1년 안에 에디슨이 해법을 내놓을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이 외에도 전기를 이용한 또 다른 첨단 기기들이 곳곳에서 선을 보였다. 특히 전화라는 장치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박람회 관람객 모두가 이 신기한 장치를 구경했지만, 쓸모 있다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윌리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여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에겐 이미 전보가 있으니 통신이 필요한 사람은 전보를 이용하면 된다. 장거리 음성 통신이 어떤 면에서 더 좋은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미래에는 멀리 있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 많을 리 없다. 내 생각에 벨 선생의 전화기는 실효성이 없어 호기심거리에 그치고 말 운명인 것 같다."

 

 화려한 전시관들과 어마어마한 인파로 인해 박람회는 성황리에 치러졌지만, 미국의 전반적인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1876년에는 선거가 있어 정치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은 의욕적으로 박람회를 개최했지만, 장군 출신의 이 작달막한 대통령은 더 이상 인기가 없었다. 그의 행정부는 각종 추문과 부패로 얼룩졌고, 투기 자본가들의 과욕은 결국 이 나라를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불황의 늪에 빠트렸다. 월가에서는 수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했고, 서부에서는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농가들이 몰락했다. (30~31쪽)

 

 종교인들은 진화론을 격렬히 반대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진화론을 열렬히 옹호했다. 그들은 적자생존의 원칙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과 간혹 부도덕한 생활방식을 합리화할 새로운 과학적 근거를 발견했다. 찰스 다윈의 친구이자 선배였던 위대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은 이렇게 주장했다.

"생존 투쟁의 세상에서는 결국 가장 강한 자들의 정의가 승리한다." (38쪽)

 

 네덜란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무자비하고 호전적인 성격에 몹시 불경스러운 언변으로 유명했던 그는 스태튼아이랜드 여객선에서 일하던 무식한 선원이었지만, 훗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무역선들을 장악했다. 후에는 철도에도 눈독을 들여 자신이 운영하는 막강한 뉴욕센트럴 철도를 뉴욕의 심장부에서 신흥 도시인 시카고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늘 화젯거리였다. 실패했을 때조차도 그랬다. 교활한 개발업자 제이 굴드에게 이리(Erie) 철도 회사의 운영권을 빼앗겼을 때 밴더빌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은 내게 스컹크를 걷어차서 좋을 게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그가 그의 법률 자문단에 불평했던 말은 전설로 남았다.

"내가 왜 법 따위를 신경 써야 하지? 난 힘이 있는데?"

말년에 밴더빌트는 점점 더 기행을 일삼았다. 점술가나 최면술사와 어울리면서 종종 중요한 사업상 문제에 조언을 구하고 죽은 사람과 대화하기도 했다. 빅토리아 우드헐 같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을 후원하면서도 손녀뻘 되는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며칠 전에는 뉴욕 일간지에 '밴더빌트 위독!'이라는 헤드라인이 떴다. 그러자 병상에 누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기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위독 좋아하시네! 설령 내가 죽어간다 해도 이런 악질 기사를 네놈들 목구멍에 처넣어줄 기운은 남아 있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기자들의 보도로는 그랬다. 물론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늙은 제독의 독설이 실제로는 훨씬 더 신랄했으리라는 걸 짐작했겠지만. ……

하버드 대학은 다윈의 생각에 반대하는 저명한 동물학자 루이스 애거시즈 교수의 안방, 즉 반(反)진화론자들의 본거지였다. 조지 피바디는 하버드 대학이라면 조카의 잘못된 사고를 바로잡아줄 학문적 성과를 낼 거라고 믿었다. 윌리엄은 이 모든 사실을, 그날 밤 흔들리는 풀먼 침대 위에서 들뜬 학생들이 잠들기 전에 소곤거리는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침 무렵 이들은 로체스터에 있었고, 한낮에는 버팔로까지 왔다. (40~43쪽)

 

 워싱턴이 이 지역을 유타 준주로 지정해 미합중국의 일부로 만들긴 했지만, 이곳은 줄곧 모르몬교가 지배하는 신정국가나 다름없었다. 종교 건축물들의 규모와 중요성이 그 증거였다. 코프 일행은 교회와 십일조 창고를 둘러보았으며, 브리검 영이 많은 아내를 데리고 살았던 라이온하우스도 방문했다.

코프는 과거 영 회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그 늙은 교주 앞에 갔었다. 윌리엄은 영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우아하고 신사적이면서 계산이 빠른 양반이지. 지난 40년 동안 모르몬 교도들은 미국의 모든 주에서 멸시와 핍박을 받았네. 이제 그들은 자기들만의 주를 만들어 이방인을 박해하고 있지."

코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을 이었다.

"불의를 겪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불의를 혐오할 것 같지만, 오히려 거리낌 없이 불의를 저지른다네. 피해자였던 이들이 이제는 나만 옳다는 섬뜩한 독선으로 박해자가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광신의 본성일세. 극단적인 행위를 야기하고 부추기지. 그렇기에 광신교는 형태와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거라네."

목사의 아들인 모턴이 물었다.

"모르몬교가 광신자 집단이란 말씀입니까?"

"그들의 종교로 세운 주에서 불의를 척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일상화 되게 만들었다는 말이네. 그들은 다른 믿음을 가진 자들에 비해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지. 자신들만 올바른 길을 간다고 믿는 거야." (98~99쪽)

 

 열렬한 사냥 애호가였던 그는 어딜 가든 사냥개 무리를 데리고 다녔으며, 그의 병사들보다 개들을 더 신경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1867년에는 자기 부대에 탈영병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일로 다섯 명이 다쳤는데, 커스터는 부상자들의 의료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한 명이 사망했다.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1867년 7월, 그는 체포되었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년 정직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장군들의 총애를 받던 그는 필립 셰리든의 고집으로 10개월 만에 복귀했으며, 이번에는 오클라호마 준주 워시타 강을 따라 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였다. ……

그제야 커스터는 자신의 과욕으로 부대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났지만, 뒤에 남은 부대원 열다섯 명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이미 죽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

커스터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1874년, 그가 부대를 이끌고 인디언의 성지 블랙 힐스로 들어가 금을 발견하면서 수족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108~110쪽)

 

 이날 내내 그들은 크고 둥근 하늘 아래서 말을 타고 끝없이 평평한 땅을 가로질렀다. 이 거대한 풍경 속에는 어쩌다 눈에 띄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나 개울을 따라 늘어선 미루나무 말고는 이정표가 거의 없었다. 실로 '풀 바다'였다. 진짜 바다처럼 길도 없고 광대했다. 윌리엄은 서부 사람들 모두가 몇몇 이정표, 폼페이의 기둥, 쌍둥이 봉우리, 노란 절벽 등을 입버릇처럼 언급하는 까닭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눈에 잘 띄는 이런 지형들은 드넓은 바다 같은 평원에 떠 있는 섬이었다. 그 섬의 위치를 아는 것은 생존에 필수였다. (123쪽)

 

 아메리카 원주민은 1만여 년 전부터 서부 평원에서 수렵생활을 했다. 그들은 빙하가 걷히고 대지가 따뜻해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거대한 마스토돈과 하마, 무시무시한 검치호랑이가 사라지는 것도 지켜보았다(여기에 그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지역이 울창한 밀림이었을 때도 사냥을 했고, 바다처럼 드넓은 초원이 된 지금도 사냥을 하고 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사냥감과 기후의 무수한 변화를 겪으며 인디언은 줄곧 이 광대한 공간에서 변함없이 수렵 유목민으로 살아왔다.

19세기 대평원의 인디언은 화려하고 극적이며 신비롭고 호전적인 무리였다. 그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들에게 매료되었다. 일반 대중에게 그들은 다방면에서 모든 아메리카 인디언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그들의 고풍스러운 의식과 복잡하게 조직된 생활양식은 진보적 사고를 가진 이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이들이 목격한 아메리카 서부 대평원의 인디언 사회는, 실제로는 현재 인디언의 존재를 위협하는 백인 사회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평원의 인디언은 아시아의 몽골족처럼 말을 중심으로 조직된 수렵 유목 사회였다. 하지만 300년 전, 스페인 군대가 말을 들여오기 전까지 아메리카에는 말이 없었다. 말이 유입되면서 대평원의 인디언 사회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

인디언 마을에 대한 첫인상은 종종 극명하게 갈린다. 1871년 아프리카에서 데이비드 리빙스턴 박사를 발견해서 유명해진 웨일스 출신 탐험가이자 저널리스트 헨리 모턴 스탠리는 커스터와 함께 블랙 케틀 마을에 들어갔다가 불결한 환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

 

 유목민인 인디언들이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이 사는 곳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평원의 인디언 마을은 마치 전사의 삶처럼 극도로 조직화되어 있다. 엘크 가죽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티피는 체계적으로 설치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질서 있게 배치된다. 티피 안에 좌식 등받이, 바닥 깔개와 생가죽 보관함을 놓아두는 것에도 규칙이 있다. 예복과 옷, 티피를 장식하는 문양을 정하는 규칙, 불을 피우고 요리하는 방식에 대한 규칙,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순간순간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규칙, 전쟁을 위한 규칙과 평화를 위한 규칙, 사냥을 위한 규칙과 사냥 전 행동에 대한 규칙, 이 모든 규칙이 엄격하고 확고하고 진지하게 준수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인디언이 전사 종족이란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146~149쪽)

 

 한창 공룡이 발견되던 시기였다.

1876년 당시에도 과학계에서 공룡을 인정한 것은 꽤나 최근의 일이었다. 19세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 거대한 파충류의 존재를 상상조차 못했다. 존재했던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1806년 7월, 훗날 몬태나 준주가 될 지역의 옐로스톤 강 남쪽 기슭을 탐사하던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의 윌리엄 클라크는 '바위 표면 밑에 박혀 있는' 화석을 발견했다. 윌리엄 클라크가 둘레가 7.6센티미터, 길이가 91센티미터라고 설명한 뼈는, 공룡 뼈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어류의 늑골로 여겨졌다.

1818년, 코네티컷 주에서 더 많은 공룡 뼈가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사람의 유골로 간주되었다. 동일 지역에서 발견된 공룡의 발자국은 '노아의 큰까마귀' 흔적으로 여겨졌다.

이들 화석의 진정한 의미를 처음 알아차린 건 영국인이었다. 1824년, 영국의 괴짜 목사 버클랜드는 '스톤스필드에서 발견된 거대한 도마뱀 화석, 메갈로사우루스'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이 화석 생물을 두고 길이가 12미터 이상이고, '높이가 2미터인 코끼리의 몸집과 같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 놀라운 도마뱀은 단발적인 생물 표본으로 간주되었다.

이듬해에 영국의 의사 기드온 맨텔이 '새로 발견된 파충류 화석, 이구아노돈'을 발표했다. 그는 영국의 한 채석장에서 발견된 이빨을 바탕으로 이 파충류의 형태를 추측했다. 처음에 그는 이 이빨을 당대 최고의 해부학자 퀴비에 남작에게 보냈는데, 퀴비에는 이것을 코뿔소의 앞니라고 판단했다. 그게 못마땅했던 맨텔은 "내가 발견한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초식성 파충류의 이빨이다"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 그 이빨이 아메리카 도마뱀인 이구아나의 이빨을 빼닮았음을 입증했다.

퀴비에 남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궁금해했다.

"혹시 이 새로운 동물, 초식성 파충류가…… 다른 시대의 것은 아닐까?"

이후 또 다른 파충류 화석들이 연이어 발굴되었다. 1832년에 힐라에오사우루스, 1834년에 마크로돈토피온, 1836년에 테코돈토사우루스와 팔레오사우루스, 1837년에 폴라테오사우루스, 새로운 뼈가 나올 때마다 그것들이 한때 지상을 활보하다 자취를 감춘 파충류 무리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점점 강해졌다.

마침내 1841년, 또 다른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리처드 오언이 이 파충류 무리 전체를 다이노사우리아, 즉 '공룡(무시무시한 도마뱀)'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1854년에 영국 시드넘의 크리스털 펠리스에서 실물 크기로 복원된 공룡들이 선을 보였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이 업적으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오언은 훗날 다윈과 진화론의 신랄한 반대자가 되었다).

1870년 무렵, 공룡 화석 사냥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바뀌었다. 북아메리카 서부에 대량의 화석이 묻혀 있다는 것은 1850년대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1869년에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이 거대한 뼈들을 옮겨 오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

발굴 작업은 허리가 부러질 것같이 힘들고, 때로는 위험했다. 우선 서부 지역이 대개 그렇듯 지형의 규모가 겉보기와는 달랐다. 작은 절벽 면인 줄 알았던 곳이 막상 올라가 보니 높이가 150~185미터나 되었다. 그렇게 가파르고 부서지는 절벽을 기어 올라가 중간쯤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작업하는 것은 극도로 피곤한 일이었다. 거긴 기묘한 세상이었다. 이 거대한 바위 위에서 일할 때면 종종 서로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사방이 너무 고요하고 구부러진 절벽들이 커다란 깔때기 역할을 해서 속삭이는 소리로도 또렷이 대화할 수 있었다. 망치가 끌을 내려치는 소리, 끌이 돌을 때리는 소리가 딸깍, 탕탕 거리며 나직하게 끊임없이 울려 퍼져도 목소리는 잘 들렸다.

이따금 더 무거운 정적과 고독감이 밀려올 때면 숨이 막힐 듯했다. 특히 크로우족이 이주한 뒤로는 괴로울 정도로 사방이 조용했다.

그리고 스턴버그의 말이 맞았다. 결국 이 황무지에서 최악은 흙먼지였다. 송곳과 삽으로 흙을 찌를 때마다 독한 알칼리성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눈과 코가 따끔거리고, 입속이 바짝 말랐으며, 콜록콜록 기침이 나오고, 상처 입은 곳이 화끈거렸다. 옷은 흙먼지로 뒤덮였다. 팔오금과 겨드랑이, 다리오금이 흙먼지에 쓸려 벗겨졌으며, 침낭 안도 버석거렸다. 음식은 쓰고 떨떠름했으며, 커피 맛도 이상했다. 바람에 날려 끊임없이 불어오는 흙먼지는 이 혹독한 금단의 땅을 대표하는 특징이었다. (157~164쪽)

 

 모턴은 어셔 대주교의 말처럼 이 세계가 6천 년이 되었냐고 물었다.

다윈을 비롯해 스스로를 '지질학자'라 칭하는 새로운 과학자들은 기존 학설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고 학식을 갖춘 이들은 대부분 여전히 어셔 대주교가 제시한 날짜를 믿었다. 사실 과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늘 다른 소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올해는 이게 옳다고 주장하다가 내년에는 다른 주장을 하는 식이었다. 과학적 견해는 마치 유행처럼 끊임없이 바뀌는 반면, '기원전 4004년'이라는 확실하고 고정된 날짜는 어딘가 그럴싸해 보였다.

코프는 세상이 그렇게 최근에 생겨났을 것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럼 얼마나 오래되었냐고 모턴이 물었다. 6천 년? 1만 년?

코프는 계속 침착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얼마나 더 오래됐을까요?

수천수만 배는 더 오래, 여전히 몽상가 같은 말투였다.

모턴이 언성을 높였다.

"농담 마세요! 그럼 40억 년쯤 된단 말씀이세요? 황당무계하잖아요."

코프는 온화하게 대꾸했다.

"사람이 없던 시대이니 알 수 없지."

모턴이 시건방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태양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요?"

1871년, 당대 가장 저명한 물리학자인 켈빈 남작이 다윈의 이론에 심도 있는 반론을 제기했다. 향후 몇 년간 다윈을 비롯해 어는 누구도 이 반론에 응하지 못했다.

진화론을 둘러싼 논란은 다양했지만, 진화라는 현상이 지구상에 나타나려면 상당한 시간, 최소 수십만 년이 걸린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할 당시에 지구의 나이를 가장 많이 본 추정치는 10만 년이었다. 다윈은 진화가 일어나려면 지구의 나이가 적어도 30만 년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새로운 학문, 지질학이 선보인 증거들은 혼란스럽고 모순점이 있었지만, 최소한 지구 나이가 수십만 년 이상일 거라는 주장은 타당해 보였다.

켈빈 남작은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태양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소되어 왔는지를 물었다. 이 무렵 태양의 질량은 잘 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태양도 지구가 연소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타오르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러한 질량의 태양이 거대한 화염 속에서 완전히 연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추정할 수 있었다. 켈빈은 태양이 20만 년 안에 완전히 타버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켈빈 남작이 독실한 신자라 진화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해서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쳤을 리는 없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객관적인 관점으로 이 문제를 탐구했다. 그리고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당시로서는 반박할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지구의 온도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갱도를 비롯해 땅을 파고드는 과정을 통해서 지하로 약 3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지온이 1도씩 상승한다는 게 밝혀졌다. 이는 지구의 중심부가 여전히 무척 뜨겁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만약 지구가 정말로 수십만 년 전에 생겨났다면 이미 오래전에 식었을 것이다. 이는 열역학 제2법칙(고립계 내부의 엔트로피 총량은 언제나 증가_옮긴이)에 명백히 부합하기에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물리학적 딜레마를 모면할 길은 하나였다. 코프는 다윈의 의견을 빌려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태양과 지구의 에너지원을 다 알지는 못하는 거겠지."

모턴이 물었다.

"과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가 있을 거란 말씀이세요? 물리학자들 말로는 그건 불가능하다던데요. 우주의 원리들은 자기네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서요."

코프가 대꾸했다.

"그 물리학자들이 틀렸겠지."

"분명 누군가는 틀렸겠죠."

"맞는 말이야."

코프의 말투는 담담했다. 열린 마음으로 모턴의 신념을 경청했던 그는 쇼쇼니족 정찰꾼 리틀 윈드의 불평도 귀담아들었다.

뼈를 파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리틀 윈드는 점점 화를 내며 발굴 작업에 반대했다. 모두 죽게 될 거라고 했다. ……

리틀 윈드는, 그들이 파낸 뼈는 까마득한 옛날에 지상에 살았던 거대한 뱀들의 것으로, 인간이 평원에서 살 수 있도록 주신께서 그 뱀들을 잡아다 벼락으로 죽였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주신은 뱀 뼈가 파헤쳐지는 걸 원치 않으며, 이런 행위를 곱게 놔둘리 없을 거라고 했다.

줄곧 리틀 윈드를 못마땅하게 여긴 스턴버그는 이 이야기를 곧바로 코프에게 보고했다. 코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어."

스턴버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야만족의 미신일 뿐이라고요."

"미신? 어떤 부분이?"

"전부 다요. 터무니없는 망상이에요."

코프가 대꾸했다.

"인디언들은 이 화석들이 뱀 뼈라고 생각해. 뱀은 파충류야. 우리도 이것들이 파충류의 뼈라고 생각하지. 인디언들은 파충류가 거대하다고 생각해. 우리도 마찬가지야. 인디언들은 이 거대한 파충류가 머나먼 과거에 살았다고 생각하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주신이 뱀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파충류가 사라진 까닭을 몰라. 그럴싸한 해답도 제시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인디언의 믿음을 미신으로 단정할 수 있겠나."

스턴버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버렸다. (168~173쪽)

 

 어느 날 오후, 윌리엄은 혹처럼 튀어나온 돌 몇 개를 발견했다. 대략 주먹 하나 정도 크기였다. 혈암 비탈 중간쯤에 괜찮아 보이는 자리를 파다가 찾아낸 것이다. 노출된 절벽 면에서 윌리엄이 파낸 그 돌들은 비탈을 따라 굴러 내려가, 절벽 밑에서 새로 발견된 알로사우루스 다리뼈를 스케치하고 있던 코프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갔다. 코프는 돌이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능숙하게 옆으로 비켜서면서 비탈 위로 소리쳤다.

"이봐!"

"죄송합니다, 교수님." ……

"멈춰!"

윌리엄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코프가 아래로 떨어진 돌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미친 사람처럼 비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

윌리엄은 기다렸다. 잠시 후, 코프가 흙먼지 밖으로 기어 나와 광기 어린 모습으로 비탈길을 올라왔다.

윌리엄은 교수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이 언덕을 일직선으로 올라오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들 오래전에 그걸 깨달았다. 표면이 너무 가파르고 물러서 지그재그로 올라와야 했고, 그마저도 너무 까다로워 대개 2킬로 미터 정도 우회해 쉬운 길로 꼭대기에 오른 다음, 거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지점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지금, 코프는 일직선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목숨이 걸리기라도 한 듯. ……

코프가 환호성을 질렀다.

"이건 이빨이야!"

그는 돌 하나에 손을 대고 손가락으로 약간 들쭉날쭉한 이빨 모양 무늬를 따라갔다. 그리고 손에 쥔 돌 두 개를 나란히 놓은 다음, 윌리엄의 발 앞에 있는 또 하나의 돌을 주워 두 돌 옆에 한 줄로 늘어놓았다. 크기와 모양의 유사성으로 보아 한 조가 틀림없었다.

"이빨이라네. 공룡 이빨."

"하지만 정말 큰데요! 기막히게 큰 공룡임이 틀림없어요!"

두 남자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이 공룡이 얼마나 거대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큰 이빨이 줄줄이 박힌 커다란 입이라면 두개골도 그만큼 크고 두꺼워야 했다. 그런 두개골과 입을 떠받치고 움직이려면 떡갈나무처럼 굵고 억센 목이 필요했다. 그런 목과 이어지는 거대한 척추뼈는 마디마디가 둥그런 마차 바퀴만 할 것이고, 그런 괴물을 지탱하려면 엄청나게 굵고 거대한 다리가 네 개는 있어야 했다. 이빨 하나하나가 모든 뼈와 관절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정도 크기의 짐승이라면, 목의 무게와 균형을 맞출 긴 꼬리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코프는 드넓은 바위투성이 땅과 그 너머를 바라보며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했다. 무섭도록 자신만만한 평소 모습 대신 고요한 경이로움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제껏 알려진 그 어떤 공룡보다 적어도 두 배는 클거야."

그들은 이미 큰 공룡을 여럿 발견했다. 그중에는 거대한 코뿔소처럼 생긴 외뿔 공룡 모노클로니우스 세 종류도 있었다. (206~209쪽)

 

 "죽은 동물의 사체가 호수 바닥에 가라앉으면 진흙 침전물이 그 위에 쌓여 점차 돌로 굳어지지. 그렇게 보존된 화석을 우리가 발견한 거야. 만약 이런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런 거대한 동물의 존재를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나?"

다들 말이 없었다. 타닥거리며 타는 모닥불만 바라볼 뿐이었다.

코프가 계속 말했다.

"내가 올해 서른여섯인데,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공룡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어. 인류의 전 세대가 지구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으며 서식하고 있는데도, 그동안 까마득히 먼 옛날, 인류 탄생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수천수만 년에 걸쳐 이 세상을 지배한 거대한 파충류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어."

조지 모턴이 콜록거리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진화론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인간의 문제를 회피했다. 다윈도 자신의 책이 출간된 후 10년이 넘도록 인간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코프가 물었다.

"독일 네안데르 계곡에서 뭐가 발견되었는 줄 아나? 모른다고? 허허. 1856년 독일에서 뼈대가 두껍고 눈썹뼈가 돌출된 완전한 두개골이 발견되었다네. 지층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아주 오래된 건 분명해. 나도 1863년에 유럽에서 그 두개골을 봤지."

스턴버그가 한마디 했다.

"네안데르 두개골은 유인원이거나 퇴화된 인간의 것이라던데요."

"그럴 리 없어. 뒤셀도르프의 벤 교수는 두개골 안의 뇌 크기를 추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네. 아주 간단해, 두개골 안에 겨자씨를 채운 다음 측정 용기 안에 붓는 거야. 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네안데르 두개골에는 현대인의 것보다 큰 뇌가 들어 있었다더군."

모턴이 따졌다.

"네안데르 두개골이 인간의 것이란 말씀입니까?"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공룡과 파충류가 진화했고, 말 같은 포유류도 진화했다고 믿으면서 어떻게 인간은 아무 단계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완전한 종이 되었다고 믿는지 이해가 안 돼."

"교수님은 퀘이커 교도시잖아요?"

코프의 인간 진화론은 여전히 친우회ㅡ 퀘이커교의 정식 명칭 ㅡ를 비롯해 대부분의 교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코프가 대답했다.

"아닐 수도 있지. 종교는 인간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네. 하지만 뭔가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내가 믿는 종교가 그것이 내 착각이고 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단정 짓는다면…… 난 더 이상 퀘이커 교도가 아닐 수도 있지." (214~215쪽)

 

 코프는 화석이 담긴 나무 궤짝들을 정리하면서, 증기선 선원들이 눈독 들이지 않도록 포장이 허술한 것들을 다시 잘 포장했다. 거의 온종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스턴버그는 아이작이 보살펴주었다. 아이작은 해열 효과가 있다면서 버드나무 가지 껍질로 차를 끓여 스턴버그에게 먹였다. ……

"뼈 화석입니다."

"뭐 하러 가져가시는 겁니까?"

"연구하려고요."

"살아 있는 동물들이 있는데 왜 뼈를 연구합니까?"

"이것들은 멸종된 동물의 뼈예요."

"말도 안 돼요."

"어째서요?"

"댁은 주님을 섬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댁은 멸종한 동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완전하신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이 멸종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건 주님의 사업에 관한 어르신의 믿음을 말한 것이지요. 만약 주님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기 위해 과거의 피조물을 없애는 식으로 점차 완전하심을 추구하신다면요"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불완전한 존재니까요. 하지만 완전하신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조는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아무렴 주님의 창조에 실수가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방금 어르신은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잘난 교수 나부랭이셨군. 좀 배웠답시고 진리를 업신여기고 신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자."

"못 배운 멍청이보다는 많이 배운 바보가 나은 법이오."

"당신은 악마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

1876년에도 이런 상황은 여전했다. 19세기 초 토머스 제퍼슨은 화석이 멸종된 생물의 흔적이라고 믿었지만, 섣불리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멸종이라는 개념을 옹호하면 이단으로 취급당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미합중국 몇몇 지역에서 진화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219~223쪽)

 

 존슨은 일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어쩌면 이토록 순식간에 약점이 이점으로 바뀔 수 있을까! 내가 사진관 블랙 힐스 아트 갤러리를 여니 내 성격상의 흠들을 새로운 눈으로들 바라본다. 이전의 내 동부적 습관은 남성성의 결여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예술성의 증거로 본다. 이전의 광산 채굴에 관한 나의 무관심은 의혹을 샀지만, 이제는 안심하는 눈치다. 이전의 나에게는 누구도 바라는 게 없었지만, 이제 나는 모든 사람이 큰돈을 지불하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을 제공한다. 바로 인물 사진이다.

……

채굴꾼의 삶은 등골이 휠 만큼 힘들고 고되었다. 이들은 모두 척박한 황무지에서 일확천금을 얻고자 멀고 험한 길을 왔다.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두렵고 피곤한 삶을 꾸려가는 이들에게 사진은 또렷한 현실감을 주었다. 성공의 당당한 증거물, 연인과 가족에게 보내는 기념품, 또는 그저 시시각각 변하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순간을 포착하고 기억하는 방법이 사진이었다. (274~275쪽)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14세 때 《뉴욕타임스》에 기행문을 투고하는 등, 문학적 자질을 인정받고 하버드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공을 인류학으로 바꾸고 대학 졸업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인류학 강의를 하다가 하버드로 돌아와 의대를 졸업했다. 의대 재학 중에 의학 스릴러 『위급한 경우에는』를 써서 '에드거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하여, 두 번째 작품인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이 500만 부 판매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영화 <쥬라기 월드>시리즈의 원작인 『쥬라기 공원』은 미국에서만 1천만 부 이상 팔리며 과학소설의 새 지평을 연 그의 대표작이다. 2008년 11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하여 미발표작이 발간될 때마다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17년에 발간된 『드래곤 티스』는 『쥬라기 공원』의 전작 격으로 마이클 크라이튼을 공룡의 세계로 이끈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경(옮긴이)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소설과 인문교양서 및 어린이책을 번역하고 있다. 마이클 크라이튼을 좋아하며 그의 사후 발표작 중 『해적의 시대』와 『드래곤 티스』를 번역하게 되었다. 뉴베리 대상작 『프리워터』를 번역하고 국제아동청소년 도서협의회 2024년 아너리스트(Honor List) 번역 부문 한국 대표로 선정되었다. 지은책으로 『맨날 말썽 대체로 심술 그래도 사랑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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