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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 - 제주바다와 해녀

by 두우주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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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장치의 도움 없이  오로지 맨 몸에 자신의 호흡조절로 바다 깊이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의 여성
'해녀'와 '물질'이란 단어에는 그네들의 거친 숨결이 녹아든 삶의 고단함과 아픔, 희망과 미래가 담겨 있다.

 

출처 : 해녀박물관

 
제주 해녀의 '물질'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방식을 그대로 이어왔고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로 낚시나 투망 또는 어전(서해안에서 밀물과 썰물의 물때를 이용해 물고기를 포획하던 전통 어로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였지만 '농자천하지대본' 사상으로 국가 유지의 근간을 농업에 두었던 이유도 있었겠으나
왜구가 수시로 출몰하여 살상을 일삼으니 어업을 크게 장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질'은 원초적인 어로 형태로 제주도 특유의 잠수 어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주를 채취하는 방법은 '물질'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제주도의 물질은 삼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기록에 따르면 제주도의 남성 잠수부를 '포작'이라고 했고 배를 젓는 노잡이 '격군'은 해녀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가서 '물질'을 겸하기도 했다.
포작은 깊은 바다에서 해삼과 전복을 잡고, 여성 잠수부 '잠녀'는 주로 얕은 바다에서 우뭇가사리와 미역을 채취해서 진상했다. 
 
1694년 <지영록>에 따르면 조정에 진상할 전복의 양은 계속 늘어나는데, 미역 잠녀는 800명이고 전복 해녀는 90명에 불과해서, 힘든 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포작과 격군이 뭍으로 도망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인조는 1629년에 제주도민이 뭍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출국금지령'을 내리게 되고 순조 23년인 1823년까지 거의 200년간 유지되는 동안, 포작과 격군을 하던 남성의 수는 계속 감소하여 '잠녀'인 여성들이 물질을 담당하게 되었다.
 

출처 : 해녀박물관

해녀들은 물질 경험에서 축적된 생태환경에 대한 민속적 지식이 상당하고 동료 해녀들에 대한 배려와 협업 등, 그녀들만의 독특한 공동체적 생활 문화를 이루고 있다.
 
한 번에 10~15미터씩, 하루 7시간 안팎을 잠수하다 보면 잠수병을 앓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저승의 돈 벌어 이승의 자식 먹여 살린다"는 제주의 속담은 물질이 얼마나 험난한 지를 말해 준다. 
 
일이 위험하고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물질의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 똥군'으로 나누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인다.
깊은 바다는 상군이 맡고, 어린 해녀는 비교적 안전한 바다에서 작업한다.
따로 정해 놓은 '할망바당'은 나이 많은 해녀들을 위한 구역이다.  
 

숨비 소리

물질에 들어간 해녀들은 1~2분간 숨을 참았다가 물에 떠오른 후 '숨비소리'라는 독특한 소리를 내며 호흡을 한다. 체내의 이산화탄소를 한꺼번에 내뿜고 신선한 공기를 몸 안으로 빠르게 받아들이는 짧은 휴식을 하고 다시 물질을 한다.
 
제주 해녀들은 그들만의 잠수복과 작업 도구를 지녔다.
가슴 앞의 두렁박은 '테왁'이라는 것으로 박을 말려서 만든 부력장치이다.
물질할 곳까지 이동하거나 물질 도중에 의지하여 쉬기도 하고 해녀의 위치를 알려 주는 중요한 도구이다.
테왁용 박은 가슴에 차기 편하도록 인위적으로 평평하게 모양을 잡아가면서 키운다.
해녀들은 빗창이나 갈퀴 하나 손에 잡고 허리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차고 부력과 맞서며 바다로 들어간다.
 

불턱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작업 중에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다.
둥글게 돌담을 에워싸서 가운데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물질에 대한 지식, 요령, 바다밭의 위치 등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상호 협조와 결속 및 의사결정 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제주도 해안에는 마을마다 3~4개씩 있었고 현재는 70여 개의 불턱이 남아있으며,
1985년 전후로 마을마다 온수 시설이 갖춰진 현대식 탈의장이 설치되어 불턱의 역할을 하고 있다.

출처 : 해녀박물관

 

세계문화유산

죄인도 볼모도 아니면서 200년간 억류되어 있던 제주도민들은 출국금지령이 해제된 19세기에 들어서야
뭍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일본인 무역상들이 매년 해녀들을 모집해서 부산 등지로 집단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고
개별적으로 두 세 가구가 어선을 구해서 육지로 떠나기도 했다.

제주 해녀의 해외 진출도 (출처 : 해녀박물관)

 
출향해녀는 19세기말부터 제주도를 떠나서 경상도나 전라도, 강원도 및 해외로 바깥 물질을 나간 해녀를 말한다.
 
물질은 바닷가에서 하는 '갓물질'과 배를 타고 멀리 나가서 하는 '배물질'로 나뉜다. 
배물질은 섬이 많은 남해나 서해 주변에서 행해졌고 제주도나 동해 부근에서는 주로 갓물질을 했다.
 
해녀의 고통과 슬픔을 담은 물질의 역사는 우리 전통의 한 줄기가 되었다.
해녀와 관련된 문화는 무형유산으로서의 역사성, 예술성, 고유성 등의 탁월한 가치가 인정되어 보존·전승하고자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해녀의 노래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1호, 제주해녀의 물옷과 물질 도구제주도 민속문화재 제10호,
해녀어업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해녀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가 되었고,
유네스코에서는 2016년 '제주해녀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했다.
(출처 : 해녀박물관)

출처 : 해녀박물관

 
저 멀리 남쪽 끝단에서 국토의 경계를 지켜온 제주도민들의 애환과 수탈의 역사에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이다.
 
중앙정부의 보살핌이나 배려보단 박해만 받아온 역사를 가진 제주도는
오히려 독립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해 본다.
 
하찮은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요즘 같은 택배문화 시대에서 제주도는 추가 배송비를 더 지불해야 한다.
거주 인구가 적은 도서지역이라면 운송 편이나 화물량이 많지 않아서 이해해 볼만도 하지만,
다양한 교통수단이 수없이 오가는 제주도의 도선료는 부당해 보인다.
 
조선에서든 대한민국에서든 제주도민으로 사는 게 이득인 적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이제, 바다에서 살고 바다를 지키고 있는 해녀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