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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환경

코레일, 제 2회 '역무원 이봉창의 독립운동' 특별전 개최

by 두우주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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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강릉역, 오송역, 여수엑스포역, 부산역에서 '이봉창의 독립운동 이야기' 순회 전시

 

출처 : 코레일, 철도경제신문

 

한국철도공사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기념관과 협력하여 '역무원 이봉창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순회 전시한다.

 

지난 4일 용산역에서 시작하여 전국 5개 KTX역에서 차례로 진행되는데,

용산역은 8월 4일 ~ 20일, 강릉역은 8월 21일 ~ 9월 3일, 오송역은 9월 4일 ~ 17일, 여수엑스포역은 9월 18일 ~ 10월 3일, 마지막으로 10월 4일 ~17일 부산역을 끝으로 순회 전시를 마친다.

 

'이봉창 의사 독립운동' 특별전은 지난해에 이어 2회 차로, 전직 철도원이었던 이봉창 의사의 삶을 기차역에서 회고하며 평범했던 역무원이 독립투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이봉창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1호 단원으로서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져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강력한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1901년 8월 10일에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11세에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세에 졸업한다. 이후 용산구에 있는 일본인 과자점에서 일하다가 19세에 용산역의 말단 임시직인 시용부로 일하게 된다. 당시에는 반일의식이 특별히 없는 평범한 식민지 청년이었다. 명석하고 일본말도 잘하는 이봉창은 빠르게 승진하여 1920년 1월 정식 역부가 되고 2월에는 전철수를 거쳐 10월부터 연결수로 근무하게 되면서 월급도 오르고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때 즈음 이봉창은 일본인의 차별을 의식하게 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과 봉급, 상여금 등의 모든 면에서 차별받는 상황에 불만을 갖고 방황하다가 개인적 사정으로 1924년 4월 사직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제의 식민지인으로 협조적인 삶을 살면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1925년 11월 오사카로 갔지만 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수없이 거절당한다. 그러던 중 1926년 2월 가스회사에 취직하면서 일본식 이름을 쓰게 되는데, 여기서도 건강상의 이유와 부당한 차별을 당하며 회사를 그만둔다. 이후 현실을 체념하며 '신일본인'이 되고자 생각했으나 그럴수록 혼란과 좌절감을 느낀다. 

 

1928년 11월 교토에서 히로히토 일왕 즉위식을 구경하던 중에 여러 일본인들과 함께 검문을 당하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봉창만 열흘 동안 감금되는 사건을 겪으며 식민지인인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때 처음으로 조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졌으나 식민지인이라는 현실과 진짜 일본인이 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오랜 시간을 방황하게 된다.

 

오사카에서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지쳐있던 중, 중국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어서 조선인들을 돌봐주고 또, 영국 전차회사에서 조선인을 고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1930년 12월 일본을 떠나 도착한 상하이에서 1931년 1월 초 김구 선생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후 1년여 동안 이봉창은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김구와 비밀리에 일왕 처단을 위한 준비를 한다. 

출처 : 위키백과

1931년 12월 13일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는 거사에 사용할 폭탄을 든 기념사진 촬영 후, 12월 17일 몸에 폭탄을 숨긴 이봉창이 상하이를 떠나 22일에 도쿄에 도착한다.

 

저 사진 속 젊은이의 표정에는 식민지인의 혼란과 좌절은 물론이고 일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조국 독립에 한몫한다는 환희만이 보일 뿐이다.

 

거사 결행을 위해 도쿄로 돌아온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행사하는 히로히토를 노렸으나, 연병장 경계가 너무 삼엄하여 거리에서 인파에 섞여 일왕 행렬을 기다리게 된다. 오전 11시 44분 히로히토가 탄 마차라고 생각한 두 번째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아쉽게도 일왕의 마차가 아닌 데다 화력까지 약해서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나머지 폭탄 투척을 준비하던 중에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걸 보고, 자진 체포되어 1932년 6월 27일까지 9차례의 신문을 받고 9월 16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공판에서 '대역죄'가 선고되어 10월 10일 이치타니 형무소에서 오전 9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주요 전시자료는 이봉창 의사가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 이후, 토요타마 형무소에서 작성한 옥중수기인 '상신서'와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 입단 당시의 기념사진 등 모두 32점이다.

 

전시공간은 이봉창 의사의 일생을 서울 - 오사카 - 상하이 - 도쿄로 4개의 장으로 나눠서 활동 거점을 중심으로 구성했으며, 특히 1부 '서울'에선 1901년 출생부터 1924년 용산역 철도원 생활까지를 보여준다.

 

코레일 관계자는 "이봉창 의사가 역무원으로 근무했던 용산역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어 더욱 의미 있다"며 "이번 전시가 나라를 되찾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기대감을 전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바로 이봉창 의사가 태어난 날이다.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 쇼와 62년을 쓰는 내선일체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우리말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데는 100년까지도 걸리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교육하지 않으면 불과 몇십 년 사이 완벽하게 잊게 된다. 당장 현실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인식의 괴리가 엄청나지 않은가! 

 

우리의 독립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독립은 일본이 2차 대전 패망으로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독립투사들이 목숨으로 이어준 나라이다. 

 

8월 15일은 식민지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신일본인'으로 동화되어 안주하는 삶에서 깨어나 하나뿐인 생명을 걸어 지켜낸 조국의 광복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8월 15일 하루가 아니라, 매일이 광복절인 마음으로 꿋꿋하게 살아야 겠다.